2022년 12월 마지막 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연말을 맞아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어울리는 시와 글귀를 추천드리겠습니다.
연말에 읽기 좋은 시 4
- 시집 "나비가 돌아왔다" / 이시영
후포 이시영
이제는 없는 듯이 있는 조용한 바다가 좋더라. 거센 파도가 밀려왔다가 거품처럼 슬며시 숨죽이는 곳. 월송정 지나 손등이 거뭇한 할머니가 제철 방어회를 떠 주는 횟집이 있는 곳. 여기에서 독도가 제일 가깝다고 하더라. 그러나 오늘은 돛배도 없고 그곳으로 부는 바람도 없어라. 젊은 시인들끼리 어울려 사진을 찍게 하고 우리는 그냥 볕살 좋은 모래밭이나 거닐며 보릿고개 넘던 서러운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더라. 땅 한 평 없어 식구들끼리 나와 바닷고기를 후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후포. 이제는 겨우 발밑이나 적시다가 고개 숙이며 물러날 줄 아는 겨울 바다가 나는 좋더라.
- 시집 "낫이라는 칼" / 김기택
눈먼 사람 김기택
똑똑 눈이 땅바닥을 두드린다
팔에서 길게 뻗어나온 눈이 땅을 두드린다
땅속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 듯이
곧 문을 활짝 열고 누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는 듯이
눈은 공손하게 기다린다
땅이 열어준 길에서 한 걸음이 생겨날 때까지
팔과 손가락과 지팡이에서 돋아난 눈이 걷는다
한 걸음 나아가기 전까지는
거대한 어둠 덩어리이고 높은 벽이고 아득한 낭떠러지이다가
눈이 닿는 순간
단 한 발자국만 열리는 길을 걷는다
더듬이처럼 돋아난 눈은 멀리 바라보지 않는다
하늘을 허공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나아갈 방향 말고는 어느 곳도 곁눈질하지 않는다
눈이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만을 본다
-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 박지웅
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 신철규
눈물의 중력 신철규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 안으로 말아 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읽어볼까요 > 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집 추천] 문예창작과 지망생들을 위한 시집 추천 (0) | 2022.12.22 |
---|---|
[책 추천] 2022 베스트셀러 결산, 올해 읽어본 시집 추천 리스트 (1) | 2022.12.21 |
[책 리뷰] 고명재 시인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0) | 2022.12.17 |
[책 리뷰] 박준 시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0) | 2022.12.16 |
[책 리뷰] 진은영 시인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0) | 2022.12.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