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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까요/시집

[책 리뷰] 이혜미 시집 "빛의 자격을 얻어"

by fakcold 2022. 11. 17.

"빛의 자격을 얻어" - 이혜미

 

서문

 

  책방에 들러 나열된 책들을 훑다 문득 멈춰 서게 만드는 제목이었습니다. 빛의 자격이란 무엇일까. 빛의 자격을 얻어서 무엇을 한다는 말일까. 시인은 이 관념적이고 거대한 세계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시집을 다 읽고 난 지금. 빛이란 어쩌면 무례한 손님일 수도, 최선을 다해 우리를 지탱하는 애인일 수도, 황홀하게 굴절하는 현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 – 이혜미
약력 – 

º 1988년 안양 출생
º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º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º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수상
º 시집 [보라의 바깥], [뜻밖의 바닐라] 출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은 다 그곳에 살고 있었다”
빛의 자격으로 내 안의 진창을 비추는 이혜미의 홀로그래피

  우리 사이에 흐르는 물의 세계, 그 속을 유영하며 물 무늬를 시로 새겨온 이혜미의 세번째 시집 『빛의 자격을 얻어』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뜻밖의 바닐라』(문학과지성사, 2016) 이후 5년 만의 신간이다. 시인은 이전 시집에서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에 몰두하며 두 세계가 마치 썰물과 밀물처럼 경계를 넘나들어 서로에게 흘러드는 사건에 주목했다. 이 책에서 이혜미의 시는 “더 이상 어떤 관계의 맥락 안에서가 아닌 홀로의 완전함을 지닌 것으로” 나아간다.
‘나’의 안에는 차마 입 밖으로 발화되지 못한 말들이 울창한 나무처럼 자라나 아프게 남아 있다. 너무나 길게 자란 내 안의 숲들을 화자는 더 이상 제 안에 두지 않기로 한다. 자신의 세계를 뒤흔들어 삼켜왔던 말의 가지들을 입 밖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깨져버린 것들이 더 영롱하다는”(「홀로그래피」) 깨달음에서 온다. “깨진 조각 하나를 집어 들어 빛과 조우할 때” 마주하는 것은 눈이 부실 만큼 반짝이는 이혜미의 시, “백지 위의 홀로그래피”(소유정)이다.
 
 -출처 : 교보문고 책소개-
 

"우리가 발명한 시간에게로"

추천 구절

 

  "저녁을 입에 물고 웃는다. 껍질을 벗긴 밤은 함부로 달고 분별없이 천박한 맛. 네가 길게 찢어내는 흐린 빛들을 바라보며 천박, 얇고 엷어 속이 비치는 어둠의 맛을 짐작한다. 형식이 좌우하는 내용들처럼.

  어긋나는 노래와 부풀어 오르는 말들뿐이구나. 우리는 지금 따듯하게 구워지는 괄호 안 일까. 엮이다 무너지는 잠시의 그물 곁일까. 그럴 때 시간은 달콤한 매듭들로 이루어진 한 덩어리의 식빵이 되었지. 각주가 더 아름다워 실패한 연구서처럼."

- p.16 "밤식빵의 저녁" 中 -

 

"치솟을수록 더 멀리 뒤처질 것을 몰라서
사소해진 위치만큼 입꼬리를 올리고
어떻게든 되돌아오는 처음에 대해 생각했지

그네를 밀어주던 사람이
새로운 뒷모습을 얻는 시간에 대해

흐린 곡선 위에 앉아 조금씩 흔들렸지만"

- p.44 "붉은 그네" 中 -

 

  "우편함에 방금 만든 눈사람을 놓아두고 추운 방으로 돌아가던 사람을 생각해. 녹아가는 동시에 발견되고 싶었던. 00. 01. 손바닥에 뜻 모를 숫자들을 그려주던 시간. 하지만 이제 마른 꽃의 일은 무릎에게. 오늘 저녁의 일은 폭설에 묻기로 했지.

눈사람은 왜 발이 없을까. 얼어붙은 오르막을 걸으며 중얼거린다.
떠날 필요가 없으니까..."

- p.116 "01" 中 -

 

[리뷰] 

난해함 : ★★☆☆☆ (시를 처음 접해도 읽어볼 만하다.)

한 줄 평 : 잘근 씹어 뱉어낸 불균질적 세계. 형체는 없지만, 보다 뚜렷한 형식이 남았다.

 

시 이야기

 

  이 세상에 만약이라는 표현이 사라진다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매일, 매시간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가정하고 걱정하며 불안해합니다. 오늘 저녁 메뉴에 대해, 내일 입을 옷에 대해, 집을 지키고 있을 우리 집 강아지 혹은 고양이에 대해. 그것이 쓸모없는 고민이었다는 사실은 대게 미래의 내가 깨닫죠.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은 과거의 내가 이미 이 사실을 깨달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안심하고 망각하고, 또 걱정하기를 반복할 것입니다. 이에 이혜미 작가는 말합니다.

 

  깊숙이 흐려져 본 사람만이 아름다운 입체를 갖을 수 있다고. 모든 일이 그러하듯 처음이란 늘 순탄치 못하고 까다롭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찬란함을 깨닫죠. 끝은 늘 영광스러울 것이고요. 하지만 과정은 시간이 흘러 처음과 끝을 화려하게 가꾸는 장식품 따위로 전락해버립니다. 바삐 잊고 마는 시간을 걸으며, 매사 처음과 끝만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나를 탁하게 휘젓던 걱정들이 지금의 나를 외려 투명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이 일련의 사건들은 저장된 굴곡이며, 그 굴곡들이 라는 피사체의 음영과 윤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시집을 덮으며, 매사 덜어내려 하기보다 우리에게 찾아온 부정적 감정을 미끼로 긍정적 감정을 낚아 올리려 보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굴절된 수면에 떠오르는
돌의 오랜 파문처럼
...
실패한 그림들을 펼쳐 보이며
색색의 비문으로 흩어지는 순간

깊숙이 흐려져본 사람만이
아름다운 입체를 가질 수 있다고

(p.49 “매직아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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