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 김행숙
서문
전작 "에코의 초상"에 이어 김행숙 시인만의 독특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우울함 속에 웃음이 피어나고, 화목함 속에 슬픔이 피어나는.
작가 - 김행숙
약력 - 1999년 「현대문학」 시 발표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1914년」 출간
자신의 언어와 존재를 모두 내걸고
당신의 말과 꿈에 다가가는 김행숙의 시 쓰기
"이야기가 그릇이라면 깨진 이야기가 있었다."
추천 구절
"요즘 도시 아이들은 구멍가게라는 단어를 모르고 자라지만 걔들도 크면 저마다의 구멍가게를 가슴에 품겠지요. 그러려고 아침밥도 먹지 않고 부리나케 학교로 가는 거겠죠.
아아, 다 감긴 테이프처럼 똑같은 노랫말로 되돌아오는 것이 정녕 아침의 속성이란 말입니까?"
- p.32 "낮부터 아침까지" 中 -
"극장에서 지루한 영화를 중간중간 졸면서 보는 기분이야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와도 여전히 그림자는 살아 있어
영화보다 영화 같다는 게 뭘까
그림자는 무게가 없으니 바람이 불면 제일 먼저 날아가야 하지 않을까"
- p.64 "그림자가 길다" 中 -
"오른손에 있는 것을 왼손에 옮길 수 있지
우리는 그렇게 흔들흔들 바구니를 손에 들고 산책을 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들로만 채우고 싶어
오늘은 4월의 금빛 햇살이 넘실거리네
달걀 껍질 같은 것
막 구운 빵 냄새 같은 것
실오라기가 남아 있는 단추 같은 것, 눈동자 같은 것,
그것은 누구의 가슴을 여미다가 터졌을까"
- p.105 "봄날은 간다" 中 -
[리뷰]
난해함 : ★★☆☆☆ (까다로운 부분이 있지만 편하게 읽기 좋습니다)
한 줄 평 : 희뿌연 창가에 서 있는 기분. 습하고 찝찝하다.
시 이야기
저는 미식가가 아닙니다. 살면서 음식 맛으로 불평을 해본 기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어느 메뉴를 고르던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는 더러 만족하는 편입니다. 평이 좋지 않은 식당이나 무작정 들어간 식당이나 그 어디에서든지 말입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주변 친구들은 맛이 없다고 가지 않던 쌀국수 가게를 저와 입맛이 비슷했던 한 친구와 거의 매주 애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주변에서의 반응은 대개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즐기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거나 식당을 조금 더 폭넓게 여러 곳 다녀보라는 권유를 듣곤 합니다.
그렇다고 혀가 둔한 것은 아닙니다. 자주 가는 식당에서 음식 맛이 변하면 어떤 재료가 추가되었는지, 또 어떤 재료가 빠졌는지 알아맞히기도 하니까요. 사실 예민하다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최근에는 음식을 먹으며 맛이 어떻든 습관적으로, 학습적으로 맛있다고 생각하게끔 뇌에 주입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의심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뭐든 맛있다고 생각하기에는 혀가 예민하고 그렇다고 그간 먹어온 음식들이 정말 맛이 없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이런저런 생각하지 않고 그저 미식가가 아니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습관적인 만족일지라도, 남들이 불평하는 식당에서도 저는 적당한 만족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것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남들은 불행을 얻고 가는 곳에서조차 저는 행복감을 얻어갈 수 있는 것이죠.
"우산을 두고 갔네. 걘 늘 정신이 없지. 그 대신 매일같이 체중계에 올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제 무게를 달아본다고 해. 조금 빠지고 조금 찐다고 해도 살이야말라 존재의 확고한 고정점이지. 그래서 우린 살을 꼬집어보곤 하잖아."
- p.22 "커피와 우산" -
전작인 "에코의 초상"을 읽었을 때부터 김행숙 시인 속 화자들은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편적으로 시만 읽고 보면 불행하고 불길함의 연속이지만, 곱씹어보면 시집 속 인물들은 그 상황을 그럭저럭 괜찮게 넘겼구나 싶습니다. 당장은 우울하지만, 그 끝에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김행숙 시인의 시에는 여러모로 동질감을 느끼며 더욱 애착이 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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